나카야마 타이쇼
『사할린 잔류 일본인과 전쟁이후 일본:가라후토 주민의 경계 지역사』
국제서원, 2019년.

 사할린 잔류 일본인의 존재는 중국 잔류 일본인뿐만 아니라 전쟁의 비극으로 전쟁이후, 특히 1990 년대 이후에 인식되여 왔다. 이에대하여 이 책은 잔류를 전쟁이 아니라 경계변동이라는 관점으로 다시 살펴보는 시도이며 경계변동이 주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제1장에서는 이민연구와 일본 식민지 연구 등의 연구 분야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다문화주의 연구와 경제 연구 등의 개념을 포함하여 기존 전근대에 국한되여 제기된 경계 지역 역사라는 개념을 근현대에까지 넙혀서 이해하는 이 책의 이론적 틀을 제시하였다. 그 특정은, (1) 기존의 지역 횡단적 연구는 일본제국을 중심으로하는 단심동심원 구조로부터 근현대 동아시아 사를 논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경계 지역사 연구에서는 경계지역을 여러제국의 영향이 엇갈리는 장소로서, 다심동심원 구조에서 근현대 동아시아 사를 논하는 것 , (2) 기존의 근현대 동아시아사 연구에서는 절반 본질화된 「국민/민족」을, 성별이거나 직업등과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속성의 하나로서 분석하는것, (3) 국가적 억압을 식민지주의거나 제국주의와 같은 자본주의 특유한 현상과는 이논화하지않고 근현대 국민국가 특유한 구조와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구조로나누어 이해하는것, (4) 국민국가의 이념간 모순을 낳은 경계변동이거나 사람의 이동/잔류등의 현상에 주목하는 것이다.

 제2장에서는, 일본 제국의 확대를 중심으로, 근현대 동아시아의 경계변동을 총람하고, 경계변동과 구 주민의 퇴거거나 새로운 주민이주의 인구 이동 외에도 구 주민의 잔류 현상도발생시키였고, 잔류가 일소전후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근현대 동아시아에서 보편성을 가지는 현상임을 밝혔다.

 제3장에서는, 전쟁이후, 사할린을 둘러싼 구 주민의 퇴거와잔류 새로운 주민의 이주와 그와 관련된 운동의 전체상을 현재까지의 시간적 범위에서 밝혔다.

 제4장에서는, 사할린 잔류 일본인 연구에 관한 정의를 명확히하고, 사할린 잔류 일본인에 관한 명보 류 13종 총 4,908명에 관한 정보를 조합하고, 또한 귀국 지원 단체의 도움을 받아 추가 조사를 한 뿐만 아니라 그 수량적 파악을 실시하였다. 이 책에서 한 사할린 잔류 일본인 정의는, (1) 1949년7월23일 현재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었거나 이 지역에 거주 경력을 가지면서 그때까지 소련 시정 지역내의 다른 지역에 이동하여 거주하고 있은 경우, (2) 일본제국시기,부모 어느 일방이 내지거나 가라후토에 원적지가 있었는가,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이 두가지 조건에 부합 되는 사람들이다. 출생년에 대해서는, 1945년 8월 10일, 1946년12월31일, 1949년7월23일, 이 세가지 기준을 사용하였다. 이 정의에 근거한 수량적 파악에 의하여, (1) 정의에 적합된 사할린 잔류 일본인은1,348~1,560명이고, (2) 녀성비율은 66~71%이며, (3) 출생년은 1924~1929년과 1947~1948년이 피크이고 두 부류 사람들이 제일 많은것, (4) 또한,위 두 피크에서 전자의 남녀 비율에서 녀성이 현저하게 많은것, (5) 후자의 피크는 전자의 피크 시기의 여성들이 전쟁이후 조선인 남성과 세대를 형성하고 출산하였기 때문에 출생한것으로 생각할수있다는것, (6) 냉전기 귀국하였기에 사할린 잔류일본인70%가 일본에 영주 귀국하고 있는것, (7) 탈냉전기에 들어가자 매년의 영주 귀국자수를 매년의 사망자수가 점차 상회하게된것, (8) 사할린 잔류 일본인의 약 70%가 한인과 일본인으로된 한일세대를 잔류 배경으로하고, 나머지 30%가 러시아당국에 의한 구류거나 일부 숙련 노동자에 대한 억류, 혹은 신분증 등의 분실 등 기타의 사유를 잔류 배경으로 하였다고 추계할수있다는것을 밝혔다.

 제5장에서는, 일본외교사료관 자료를 주요하게 사용하여, 1957~1959년에 사할린부터 진행한 냉전기 집단귀국과 1976 년까지 지속된 냉전기 개별귀국으로된 냉전기 귀국에관하여, (1) 냉전기 집단귀국은 일소 국교정상화 직후에 실시한 시베리아 억류자의 「총결산 귀국」과의 연속성가운데서 실시되였다는것, (2) 일본정부는 사할린 잔류 일본인의 전체상도 러시아측의 송환계획도 충분히 파악하지 않은채 배선과 접수를 진행한것, (3) 러시아는 일본과 국제사회의 이목을 모으는 집단귀국 방식을 싫어하여, 귀국 지망자수의 감소를 이유로, 1959년에 집단귀국 방식을 페지하고, 개별귀국 방식으로 일원화하여 그후 년간 귀국자수가 급격히 감소되여, 1965년 대량적 귀국이 기도되였을때에도, 일본측에서 제출한 집단귀국 방식을 러시아측에서 거절하고 개별 귀국 방식이 채용되였다는것, (4) 개별귀국에대해 출국지점인 나홋카까지(당초에는 일본까지)여비가 자기 부담이였기에, 귀국하는데는 경제적인 여유가 필요하였다는것, (5) 냉전기, 귀국자중의 일본인은 잔류자 귀환 촉진 운동등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일본인 세대인과 동반하여 귀국한 한인의 일부분은 사할린 잔류 한인의 귀환 촉진 운동을 위하여 「가라후토 귀환 재일 한국인회」를 일본국내에서 결성하고 그 활동에서 수집한 정보에 근거하여 사할린 잔류 한인의 약 20%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을 귀국할 국가로 지망하고 있었다는것을 밝혔다.

 제6장에서는, 사할린 잔류 일본인의 냉전기 귀국이 1966년이후 정체되고, 1977년이후 끊어진 윈인에대해 일본외교사료관자료, 국회회의록, 당사자에대한 청취조사, 퇴거자단체 간행물에 근거하여, (1) 냉전기의 집단귀국을 둘러싸고 일본입국을 지망하는 한인들이 위장 결혼한 한일 부부거나 일본인 한인으로 자칭하는 불법 입국혐의 한인문제가 발생하여 일본 국회에서 문제로 제기된 동시에, 냉전기 귀국사업에 대한 일본국 내의 소극적인 태도의 원인의 하나로 되였다는것, (2) 불법 입국 혐의가 있는 한인 문제 발생 배경은, 일본 제국기 원적지에 대해, 일본인과 한인을 가르는 선을 끈치 않은 일본 정부와 전쟁이후 발행한 국내신분증에 관한 민족란에서 그 근거를 찾으려한 러시아 정부와의 주민관리 방법차이,및,일본 제국기에 형성된한일세대의 일소전기와전후의 이산가족문제가 제기되고있는것, (3)외교사료관에 남겨있는 귀국 애원서류는, 냉전기 귀국하기위하여,사할린 잔류 알본인과 일본정부 각 기관 일본국내 자치체, 일본에있는 가족이 러시아로부터 출국 허가를 얻기위하여 서류를 장만하기 위하여 작성된 일련의 서류라는 것, (4) 일부의 사할린 잔류 일본인 여성들이 일본 정부에 보낸 귀국 애원서에서 전후 한일 세대 형성을 이유로 일본 가족한테 일본 귀국을 거절당한 우려도 읽을수 있는것 , (5)귀국자단체 전국가라후토연맹은 사할린 잔류일본인에 대해 무관심한건 아니지만 ‘총결산귀국’에 의해 구 요인들의 일본송환이 끝난 것, 그것에 이은 사할린 냉전기 집단 귀국의 대부분이 한일 세대인 것, 일러국교정상화전후에 영토반환운동을 일으킨 것으로부터 그 후 사할린 잔류일본인 귀국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 (6) 1966년이후의 정체는 그때까지의 귀국실현에 의해 귀국조건을 갖춘 잔류일본인이 감소된 것, 재일한인의 증가와 러시아에서 자란 세대의 사회통합코스트를 우려한 일본정부의 잔류일본인귀국사업에 대한 소극적화, 잔류일본인의 인도문제화를 회피하려고 한 러시아정부의 의도, 이 세가지가 겹쳐서 생긴 것, (7) 1977년이후의 귀국자두절은 전기에 이어 1970년대중반에 일어난 우메무라히데코사건, 도만상사건에 의해 일본이나 한국에 귀국의사표명이 위험한 행위라고 인식된 것이 배경에 있은 것, (8) 1988년 일본 국회에서 후생성담당자가 그 단계에 소식이 판명된 잔류 일본인은 “자기의사잔류”자임을 언명하는 것에 이르지만 그 배경에 가라후도 성묘에 수행한 외무성직원의 보고, 러시아 주재 일본국 대사관을 경유하여 러시아정부에 제공한 정보중에 자기의사 잔류자의 존재가 반복된것이 언급된 것을 밝혔다.

 제7장에서는 외교사료관의 자료와 사할린의 잔류 일본인과의 청취로 냉전 시기의 사할린 잔류 일본인의 상황에 관하여, (1) 1965년 이후 원주민에 의한가라후도 성묘가 실현 되였지만 성묘가 주요 목적으로 되엿을뿐 잔류 일본인의 실제 상황조사와 이산가족들 재회는 기획되지 못한 것, (2) 성묘는 원주민과 잔류일본인과의 접촉은 발생시켯을뿐만아니라 그때까지 서로 인지 못했던 잔류 일본인 간의 교류를 심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로 되여 또 그곳에서 결합한 관계는 포스트 냉전기 귀국 운동과 이어지는 일로 되였다는 것, (3) 냉전기에 있어서 잔류 일본인중 일시 귀국을 희망하는 소리가 많은 것을 일본정부는 파악햇음에도 스스로 일시 귀국사업을 수행하지 않은 것, (4) 하지만 냉전기에 있어서 개별의 일시귀국 사례도 있었다는 것, (5) 잔류가 지속되는 배경에는 한인남편과 성장되여 주체성을 가지게된 아이들의 반대,사할린에서의 생활 안정으로, 일본에 귀국한후의 생활 불안,일본 사회에 있어서 한인차별에 대한 두려움 러시아정부에 의한 출국불허가등이 열거된 것,(6) 전쟁후 한일 세대 형성경위와 동기에 관하여서는 자유연애와 내키지 않는 결혼이라는 이면성을 가지는것과 마찬가지로 냉전 시기의 귀국, 잔류 의지를 둘러싸고 아주 낮은 경계의 투명성이 전제로 되여 있고 결혼의 자발/강요, 본인 의사잔류의 정말 여부와 같은 단순한 두가지 가치적 이해로는 부족한 것 을 밝혔다.

 제8장에서는 귀국 지원단체의 내부 자료 및 회보지, 관련자 문의조사에서 1990 년 이후 시작된 탈냉전기에 귀국에 대해 (1) 1980 년대 말부터 시작된 일본과 사할린 경계의 투명성의 상승으로 사할린를 재차방문하는 원주민의 인수와 질적 다양성을 증가시켜 사할린의 잔류 일본인 귀국 지원 운동 단체 「가라후토(사할린)동포 잠시 귀국 촉진회(이후의 일본 사할린 동포 교류협회)」가 원주민을 중심으로 일본 국내에 설립 된 것, (2) 이 귀국 지원운동은 냉전시기 부터 일어난 사할린 잔류한인귀환촉진운동의 수법과 자원을 활용한 것, (3) 일시귀국단의 실현으로 사할린의 일부 잔류 일본인 사이의 프라이빗 교류팀이 사할린 전체 잔류일본인 단체 「사할린 북해도인회(일본인회)」로 발전시켜 귀국 촉진을 추진하게된 것, (4) 귀국자단체는 내부의 영토 반환운동의 적극파 존재와 잔류 일본인 문제 절박성 이해의 심도로 귀국촉진운동을 감당하는 주체가 되지 않았고 초기에는 협력관계이지만 결국은 상술한 새로운 단체가 귀국 지원 운동을 감당하기로 된 것,을 밝혔다.

 경계변동이 주민들에게 준 영향을 분명히 하기 위해 상기의 식견을 근거로 잔류일본인을 일본인 귀국자,재일한인 두 집단과 비교함으로써 (1)일본인귀국자중에는 사할린 귀환권을 요구하지 않고 영토반환만 요구하며 냉전기,포스트냉전기 쌍방에 있어서 잔류 일본인이나 잔류 한인의 영주귀국이 반드시 이산가족가정 재통합이나 출신지 귀환을 의미한다고는 할 수 없고 어디까지나 지리적공간으로서의 <고향>이 아니라 생활공간으로서의 <조국>에서의 거주실현을 우선시한 것이 보여주다싶히 경계변동에 의해 원주민은 퇴거자(광의의 귀국자)나 잔류자나 <조국>의 일부로서의 <고향>을상실했다고할수있는것, (2)잔류는재경계화과정(1945年8월~49년7월)에 퇴거 (귀국)의 불철저함에 의해 생긴 것, 월경화과정(1949년7월이후)에 경계의 투과성의 저위상태에 의해 계속되고 경계변동이전의 생활권과의 분단이 생긴 것, (3)다만 잔류의 계속을 초래하는 것은 전기의 투과성의 저위상태와 같은 국제적인 매크로 수준의 요인뿐만 아니라 본인의 생활불안이나 이산가족과 현재가족 쌍방의 의향등 사적인 마이크로 수준의 요인도 중대한 요소라는 것이 밝혀졌다.

(번역: 하나이 미와, 김용희)
게재: 20198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