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야마 타이쇼
『아한대 식민지 가라후토 이민 사회 형성: 주변적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식민지 이데올로기』
교토대학 학술출판회,2014년。
(일본농업사 학회 수상,2016년)。

    일러전쟁후 포츠머스조약에 의해 일본령으로 된 사할린섬 남부가라후토에는 일본인을 중심으로 하는 이주자를 위주로 거기에 선주민족, 잔류러시아인등 선주민으로 잡거한 이민사회가 형성 되였다.

   본서의 목적은 일본제국식민지 가라후토의 이민사회의 형성과정에 있어서 어떻케 내셔널아이덴티티가 재생산되고 식민지 특유한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였는가를 아날학파 페르낭 브로델이 말한 ‘장기지속’에 주목하면서 농업사회사의 관점으로 밝히는것이다.

    제1장에서는 일본식민지연구,내셔널 아이덴티티연구,다문화주의연구 등을 기초로 이론적 검토를 하고 ,본서에서는 (1)Wil Kymlicka의multi-nation state과poly-ethnic state의 개념을 원용하여 사할린 섬이 근현대에 있어서 일관하여 그 다문화성이 이주자에 유래하는( poly-ethnic society )고 규정 한것, (2)일본령 가라후토를 그 법의제도상 차이로부터 일본제국내의 ‘식민지’라고 규정한것을 논하였다.

    제2장에서는 북대식민학파에 의한 동시대의 관찰과 1990년대말 이후에 새로 나타난 가라후토 농업사연구의 성과를 비교함으로써 후자가 가라후토청의 정책 자료를 주요 분석대상으로 하였기때문에 가라후토 농정의 의향을 따른 형태의 농업만이 의논 대상으로 되였고 북대식민학파가 당시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던 기타 농업형태 분석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제3장에서는 가라후토청의 통계‘가라후토청 治一斑’,‘가라후토 통계서’및 기타 농정자료외에 서해안蘭泊村富内岸沢부락과 동해안泊岸村楠山 농경지촌락에 관하여 비정책 자료에서 가라후토에 있어서 농촌 촌락 형성과정에 대하여, (1)내지에서 가라후토에 건너 처음부터 농업에 종사하는 직접 입식형 뿐만아니라 가라후토에 간 당초에는 림업 및 수산업등 다른 산업에 종사하고 있던 세대가 농업에 종사하게 되는 전업입식형 세대가 농촌부락에서 널리 보였던 것, (2) 미식습관에 의해 현금수입이 필요되여서 림업을 비롯한 노동 소득에 대한 이존이 큰 이민겸업세대의 존재가 널리 나타난것, (3) 이민겸업세대에 있어서는 소자본보다 말자본이 우선적으로 도입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 원인으로서 말자본이 농업개간 뿐만아니라 림업 및 운반업 등에도 투입이 가능한 현금수입에 직결한 자본이라는 것을 들 수 있다는것,을 밝혔다.

    제4장에서는 1928년에 거행된 쇼와의 대례에 맞추어서 거행된 가라후토 충실한농가 현창사업에 대하여 가라후토청 농정자료와 가라후토의 현지 미디어 자료,관보 등 일본정부 재료를 이용하여 (1) 동시기는 가라후토청의 농업이민의 초래부터 정착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해당하다는 것, (2) 그때문에 관제의 농업경영 모델은 아직 확립되지 못하고 충실한농가의 선출 기준은 영농 형태보다도 그 성공 및 촌락내에서의 지도성이 중시를 받고 있었다는것, (3) 가라후토청은 쇼와의 대례라는 내셔널 이벤트에 관련시킨 가라후토 충실한농가 현창사업을 전개함으로써 사적영농의 성공자들을 가라후토 농업척식의 공로자로서 연출하고 가라후토 척식에 국가적가치가 있다고 농업 이민들에게 인상화시키고 농업 척식의 진흥을 시도했다는것,(4)그러나 1930년대 중반에는 가라후토 척식 계획의 입안과 실시에 따라 관제의 농업 경영모델이 확립되였기 때문에 충실한 농가들이 가라후토 농정 자료거나 현지 미디어에 등장하는 빈도는 격감하고 가라후토청의 관심은 이러한 자주 노력에 의한 성공자인 ‘기존인물 ’에서 국가 기관이 정책에 따라 교육훈련한 ‘육성인물 ’로 옮겻다는 것, (5) 이와 같이 ‘기존인물’에서 ‘육성인물’에 농정의 관심이 옮겨지는 것은 일본 제국의 내지 외지를 불문하고 공통 현상이였다는 것,을 밝혔다.

    제5장에서는 농정 자료와 현지 미디어 자료에서 식민지 관료 및 교육자, 보도 관계자 등 식민지 엘리트의 언설에서, (1)식민지 가라후토의 일본 제국에 대한 주요한 의의를 내지 과잉 인구의 수용지로 인정하고 가라후토의 자연 환경에 적합한 식료 자료 비료를 자급하는 가족 경영의 농업 세대의 창출을 목표로 하는 소농적 식민주의가 가라후토 농정의 근본 원리로 되는 중요한 식민지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고 있었다는것, (2) 1930년대 중엽에는 가라후토에서 태여난 이민 제2세대의 증가와 함께 이민 제2세대와 직접 상대하는 교육 관계자를 중심으로 가라후토의 국가적 의의 및 독특한 문화의 필요성을 논하는 ‘가라후토 문화론’이 식민지 엘리트 사이에서 형성되게 되엿다는것, (3)1939년에는 이러한 식민지 엘리트의 문화 운동에 대해 이해를 표명한 棟居 俊一 (무네스에•슌이찌)가라후토청 장관의 후원으로 관제 문화단체 ‘가라후토 문화 진흥회’가 발족했다는것, (4)가라후토 문화 진흥회는 가라후토의 의의를 일본제국 및 그 국민들이 더욱더 북방으로 발전할 것을 요구하는 ‘북진 전진 근거지’(북진주의)와 그것을 위한 생활 문화거나 기술,사상의창조를가라후토의 사명으로 하는 ‘아한대문화건설’(아한대주의)라는 가라후토 문화론의 이대 테제를 내건 것, (5) 이들은 종래의 가치관으로는 소극적으로 평가당하는 요소를 오히려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긍정적 평가에 전화하여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재생산을 도모하는 ‘주연적 내셔널 이이덴티티 ’였다는 것,을 밝혔다.

    제6장에서는 1929년에 가라후토내의 각종 산업시험 연구 기관을 통합하여 발족한 가라후토청 중앙 시험소의 활동에 대해 중앙 시험소 자체의 간행물 및 기사의 미디어에서의 담론 등을 분석하여, (1) 중앙 시험소는 가라후토 기간 산업인 제지 펄프 산업을 위해 큰플랜트형 기술 연구 개발에 참여하지 않앗던 것, (2)중앙 시험소의 연구 내용의 특징은, 농가 경영 체내의 자급성 향상과 산업간 폐기물의 유효 이용 등 가라후토 전체에서 자급력 향상을 목표로 한 것이 언급된 것, (3) 따라서 농업 부문에서는 벼농사의 시험 연구가 인차 중단되고 연맥식과 빵용 밀의 개발과 보급에 힘이 쏠려 있었다는 것, (4)가라후토 문화론의 형성에는 중앙 시험소의 기사들도 깊이 관여하였다는 것, (5)가라후토 문화 진흥회 결성과 같이 1939년에 개최된 중앙시험소 10 주년 기념 사업인 ‘동아 북방 개발전’에서는 가라후토 문화 진흥회의 가라후토 문화론 이대 테제가 답습되여 따라서 과학적 공헌이 주장되였던 것, (6) 전시 체제하에 신설된 보건부와 敷香지소는 가라후토의 자연 환경에 적합한 의식주 문화와 기술의 개발 보급,敷香지방 특유의 동식물 자원의 산업화를 목적으로하고 가라후토 문화론 이대 테제가 여실히 반영하였다는것 을밝혔다.

    제7 장에서는 농정 자료와 현지 미디어 자료에 나타나는 ‘벼농사를 못 짓는 가라후토에서는 쌀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가라후토 미식철폐론’의 내용과 배경 그 변이에 대하여, (1)1920년대 후반단계에서 가라후토에서의 영농의 성공을 위해서는 개별 농가가 현금 수입이 필요한 미식을 끊고 자가 생산할 수있는 연맥과 감자 등을 주식으로 해야한다는 정책 합리성에 근거한 ‘식민지적 미식철폐론’이 농정 자료에서 인정 받게되는 것, (2)1930년 전후에는 현지 잡지에 전개 된 ‘가라후토 농업 논쟁’에서 미식 부정에 의한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소외가 농업 세대에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가라후토 농업 척식에 기여하는 국가적 가치의 실현이라면서 정당화하려는 논리가 가라후토 농정 관료와 농업 기술자에 의해 전개 된것, (3)1930년 후반기에는 같은시기에 발흥한 가라후토 문화론의 일환으로 ‘문화론적 미식철폐론’이 나타나 비미식 대상이 농업 세대로부터 가라후토 주민 전체로 확대 된것, (4)1939년 일본제국내의 쌀 수급의 핍박은 가라후토 식민지 엘리트에게는 주식 전환을 추진하는 기회로 되여 ‘영양식’ 과 ‘낙농식’이라는 이름으로 섬산품을 이용한 음식 문화의 보급을 도모했지만, 이듬해에는 棟居장관이 경질되여 새로운 장관小川正儀 (오가와 마사요시)는 일본 제국의 쌀 부족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하여 주식 전환 운동을 억제한것, (5)이처럼 가라후토 주재기간이 길거나 가라후토 출신인 등으로 가라후토 자신의 주연적 내셔널 아이덴티티를 주장하는 식민지 엘리트와 가라후토 독자주의에 이해를 못하는 小川장관과 같은 제국 엘리트 사이에는 사상상 대립이 발생하였다.게다가 가라후토 주민들도 충분한 식량 공급 전망을 알려줄수 없는 小川장관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동시에 가라후토 주민의 대부분은 미식을 계속 실천하고 주식 전환을 주장하는 식민지 엘리트들의 주장에 동조하고있는 것은 아니고 식민지 엘리트가 식민지 주민의 대변자가 아니 였 던것,등을 밝혔다.

    제8장에서는 전장까지의 논의를 총괄하고 벼농사 불가능 지역이라는 가라후토의 장기 지속이 내지의 과잉 인구 수용지라는 일본제국 식민지로서의 의의와 소농적 식민주의라는 식민지 이데올로기를 전제로한 정책적 합리성에서 도입받은 농업 형태에서 벗어나 경제적 합리성에 근거한 이민겸업세대와 같은 농업 형태를 발생시키고 가라후토 농정 전업 농가의 창출을 위해 가라후토 충실한 농가사업등을 이용하여 가라후토 농업 개척이 국가적으로 가치있는 일이라는 인식을 구축하려고 시도하고 중앙 시험소도 식량을 포함한 가라후토 자급성 향상을 위한 기술 개발 보급에 열중하고 게다가 주요 직원 일부는 가라후토 문화론 형성에 깊이 관여하여 문화 개조를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고 비미식이야말로 새로운 일본인이라는 로직에 의해 식민지 주민의 주연적 아이덴티티를 환기하려고 계속 시도했다는 일련의 구조를 논했다.

(번역: 하나이 미와)
(게재: 2019년8월10일)